문헌상으로는 1123년(고려 인종)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우리나라 밀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.
고려도경에는 “고려에는 밀이 적어 상인들이 경동도(중국 지방 이름)에서 사온다. 그러므로 면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.”고 적고 있다.
이를 근거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밀은 참 귀한 존재였다는 인식이 지배해 왔다.
그렇지만 주목할 점, 서긍은 오늘날 세계 밀 생산1위국 중국의 최대 밀 주산지이자, 밀을 제1의 주식으로 하는 화북지방 출신이란 점이다.
지천이 밀로 둘러싸인 곳에서 온 외지인 눈에 고려의 밀, 그 양이 제법이라도 눈에 들 리가 없었을 터이다.
당시 밭 농업 비중도 상당했을 터, 요소요소에서 밀은 잘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.
그렇지만 상거래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, 그 밀이 어디로 집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.
상당규모여도 개별 가정 단위, 마을단위 소비가 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.
이 추론의 근거는 바로 1910년 우리나라 밀 재배 통계이다.
1910년 우리나라 밀 생산량이 자그마치 91,624톤, 지금의 3배였다.
인구는 지금의 1/3 (17,000,000여만 명), 인구대비로 오늘날 300,000톤에 이르는 양이다.
재배면적 기준에서는 129,173ha, 지금의 13배 이상이다.
그래서 고려시대 밀 넘쳐날 정도는 아니지만, 그렇게 희귀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수정할 필요이다.
최근 일본 밀 학자가 우리나라 제분기업을 논하면서 “국내 밀 생산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...”의 표현을 쓰는 것을 봤다.
그런 시야에서 서긍도 고려의 밀을 접했을 것이다.
그래서 고려시대, 조선시대 밀이 귀했다는 것은 수입밀로 밥상을 지배하고자 하는, 지금까지 수입밀에 빌붙어 온 우리나라 천민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일 수 있다.